21st Century Museum: Monument of Culture Industry

미술관, 문화산업의 기념비인가?

:: Space of Leisure/Entertainment Industry
:: Museum Building, Architecture or Monument
:: Toward an Aesthetic Forum

21세기에 들어 전세계적으로 미술관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상과 소위 스타 건축가들의 대규모 건축 시장 독점은 글로벌 신자유주의 경제의 확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쇠락한 근대 산업 도시들은 1990년대 중 후반에 들어서면서 문화(실제로는 문화-엔터테인먼트 산업)를 앞세워 브랜드화 하는 도시 마케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특히 근대 광산도시에서 신 문화 산업 도시로 성공적으로 탈바꿈 한 빌바오 시의 경우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 한 구겐하임 뮤지엄 빌바오 건축물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면서 관광 수익에 큰 몫을 하게 되었고, 이 예를 따라 유사한 행보를 걸어 온 도시마다 빌바오 효과를 노리며 스타 건축가의 브랜드 가치가 더해진 랜드마크 건축에 열을 올려왔다. 한국 역시 1990년대 지방자치체제가 본격화되면서 도시 간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졌고, 도시 발전의 척도가 곧 도시 브랜드 가치의 향상과 동일시 되면서, 도시마다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역점을 둔 국제 문화 이벤트를 개최하거나 더 높고 더 거대한 최첨단 건축물을 도시의 상징물, 랜드마크로 세우는 것을 기본적인 조건으로 여겨왔다.

미술관의 레저/엔터테인먼트 산업 공간화
Space of Leisure/Entertainment Industry

물론 상업적 용도나 주거 용도의 건물이 랜드마크 건축물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 문화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결합된 레저 용도의 건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미술관(근래에는 도서관)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미술관이 제공하는 기본적인 볼거리에 더하여 최근에 들어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과 공연 등의 이벤트가 더해지면서 말 그대로의 복합에듀테인먼트 공간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문화를 교육의 방식으로 소비함으로써 단순 소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생산적인 레저로 교체하기 때문에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원하는 계층이라면 누구나 ‘참여’하고 ‘접근’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더해져 건물 자체의 시각적 랜드마크 효과에 사회적 브랜드 가치를 더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참여’의 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참여는 흔히 체험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데, 이것은 가상의 것, 복제된 것, 임의로 주어진 것에 대한 대체된 경험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경험을 대신하여 축소된 테마관에서 생태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테마파크적 모의(거짓) 경험이다. 한편, 주로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미디어 전시에서 관람자의 인터랙션을 유도하는 것을 두고 일방향적인 정보 제공과 대비되는 쌍방향적인 교류로 보고 그것을 참여적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주어진 조건과 제한된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는 반응적 체험에 불과하다. 그런데 체험을 자발적인 참여, 나아가 민주적인 것과 같은 의미선상에 놓음으로써 체험 공간에 대한 막연한 긍정의 모조적 이미지를 생산하게 된다. 현재 미술관에 대한 인식과 미술관 공간 경험이 가져오는 계층적 간극—나도 이제는 미술관에 간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하기는 어렵다—은 이러한 의미상의 오류에서 발생하는 모조적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여하튼 현재 미술관은 흔히 박물관으로 불리는 컬렉션에 기반한 고전적인 의미의 전시보다 기획 전시, 특히 센세이셔널 한 대중적 기획전시로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고, 이 같은 이벤트적 전시와 더불어 카페, 레스토랑, 쇼핑 공간 등이 확대되면서 전형적인 종합 레저/엔터테인먼트 공간화되어 가고 있다.

미술관 건축물의 기념비화
Museum Building: Architecture or Monument

세계 각지의 대도시에서 랜드마크 건축물로 지어지는 대규모 미술관의 디자인은 대부분 이름 값이 높은 소위 스타 건축가들에게 그 일이 맡겨지고 있다. 렘 쿨하스, 프랭크 게리, 자하 하디드, 렌초 피아노, 딜러 스코피디오 앤 렌프로, 장 누벨, 타다오 안도, SANAA (카즈요 세지마, 류에 니시자와) 등 불과 열 명 안팎의 건축가들이 글로벌 뮤지엄 건축 디자인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건축가/회사는 공모와 경쟁을 통해 선정되지만, 많은 디자인 커미션이 이들에게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보다 건축가/회사의 명성과 그들의 시그니쳐 스타일이 보유한 브랜드 프리미엄을 더하기 위한 것으로, 실제 이들이 디자인 한 건물은 누구누구의 건물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번쯤 찾아가 볼 만한 관광명소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한편,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이것이 진정한 브랜드 가치를 더하는지, 또 지역의 장소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부분이다. 건축가는 디자인적인 차원에서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게 마련이지만 이들 스타 건축가들의 디자인은 특히 시그니쳐 스타일(렘 쿨하스의 세포분열적 기하학 형태, 자하 하디드의 유기적 곡면, 렌초 피아노의 날아갈 듯 가벼운 투명성)에 대한 요구와 의존도가 매우 높아 상대적으로 해당 지역만의 특수한 장소적 특수성을 상대적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렘 쿨하스가 베이징에 중국공영방송 CCTV 본사 건물을 디자인할 때 베이징 시내의 오래된 전통 가옥 집합체의 반복적 선에서 건물의 기하학적인 사선을 연상하여 신-구의 조화를 고려했다고 설명하지만, 인근의 모든 건물을 삼켜버릴 듯 압도하는 CCTV 건물의 거대한 규모를 보아서는 지역성이나 주변 환경을 고려했다는 논리가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디드는 자신의 유기적 디자인을 형태상으로 나타나는 곡선/곡면, 대지와 건물의 연계, 건물과 지역 커뮤니티 간의 연결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지만 역시 압도적인 규모와 하디드만의 독특한 수평적 펼침에 기반한 곡선/곡면 형태는 그 장소의 역사적 흔적을 말끔하게 삭제해버린다. 조선시대 군사 훈련장인 훈련도감, 일제강점기의 경성운동장, 해방 이후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이라는 [전]근대적인 국가 주도의 집단적 훈육 공간을 신자유주의적 문화 경제의 상징 공간으로 완전히 대체한 것이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특히 아랍에미레이트연방의 두바이, 아부다비,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 청두 같은 신흥 기획도시들, 그리고 뉴욕이나 런던처럼 재개발이 본격화 된 근대 메트로폴리스에 집중되고 있는데, 이는 글로벌 스타 건축가들의 시장 독점 및 이들의 기념비적 건축의 세계화가 글로벌 자본주의 경제와 맞물려 있음을 말해준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같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실 수 있고 동일한 H&M 매장에서 옷을 구매할 수 있듯이 어느 도시에서든 거의 유사한 하디드 스타일의 건축물을 하나쯤 찾아볼 수 있고, 그것은 그 도시가 아닌 다른 지역 어느 장소에 두어도 자체의 브랜드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장소적 문맥과는 별개로 탄생한 작품이자 상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념비화 되어가는 미술관 건축물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스타일 상의 특징은 가벼움과 투명성이다. 하중을 줄이고 지지체를 최소화하여 공간을 최대화하는 것이 건축사의 전개과정이었다면 지금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구조, 외피가 곧 구조가 되는 기술에 거의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투명 유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이음매 없는 곡면을 창출함으로서 건축가들은 중력에 대한 저항을 시각적으로 한층 더 부각시켜나간다. 그러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렇게 기화될 듯한 구조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전면 유리벽 구조의 경우) 공간 없음이거나 (하디드의 창 없는 벽면의 경우) 폐쇄공포적 공간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글로벌 스타일이라면 그 특징은 스타일 자체라기보다 그것의 끊임없는 재생산으로 인한 장소성의 삭제, 역사적 컨텍스트와의 분리, 건축물과 공간의 상품화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경험 세계를 축소해간다.

미적 공론장으로
Toward an Aesthetic Forum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모두 미술관의 콘텐츠보다 미술관 건물 자체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내용과 외관(미술과 건축) 사이에 불안한 긴장을 발생시키는 문제로 이어진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미술관 건물의 목적 자체가 에펠탑과 같은 상징적 구조물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그 자체로 기념비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결국 미술관이 무엇을 위한 기념비가 될 것인가는 콘텐츠의 문제로 귀결된다. 미술관의 콘텐츠는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 등으로 외화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미술관이 보유한 컬렉션과 아카이브에 기반한다. 미술관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개인 수집가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컬렉션이 일정한 양적 한계를 넘어설 때, 그리고 카테고리화를 통해 의미상의 논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을 때 대중을 대상으로 공개하는 인스티튜션의 형식을 갖추게 되면서 미술관이 탄생하게 된다. 다시 말해 미술관의 핵심은 컬렉션에 있고 그 존재의 지속가능성은 콘텐츠가 계속해서 세포 분열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전시 기획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체 컬렉션과 콘텐츠 기획이 부재할 때 미술관은 외부 전시 대관으로 유지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미술관을 임대 공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외부에서 생산된 문화 상품을 빌려와 수익을 내는 부동산과 자생적 문화를 일구어가는 창조 공간은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 자체 컬렉션과 기획이 부재한 미술관은 두바이의 루브르 박물관 분관처럼, 궁극적으로는 식민화된 문화의 이식과 확산에 기여하는 임대 시설의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지자체마다 랜드마크 건축물로 외부의 시선을 주목시키고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경쟁 속에서 텅 빈 기념비적 미술관들이 계속해서 기획되고 있다. 무엇보다 미술관 같은 콘텐츠 기반의 건축물은 부동산 임대 개념과 전혀 달라서 정치적 혹은 행정적인 성과를 위해 일정 기간 내에 완성시킨다거나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말 그대로 문화 공간으로 지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미술관의 목적을 분명히 하여 기획되어야 하고(박물관 형태, 아카이브-도서관 형태, 기획 전시 혹은 대관 전시 중심 형태, 체험 교육관 형태 중 어떠한 방향을 추구할 것인가) 그에 부합하는 컬렉션과 아카이브 구축 계획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장기적인 투자가 이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 기관으로서의 미술관 건립이 정치적/행정적 성과를 위해 이용되지 않도록 분리시키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박물관에서부터 체험 위주의 어린이 교육 공간까지 포괄하는 뮤지엄Museum이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미술관으로 불리면서 시각예술 전시장으로 의미가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 미술관, 박물관 또는 그 밖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건 간에 오늘날의 뮤지엄은 유형의 오브제를 중심으로 지각과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 위주로 유지, 발전될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어떠한 전시를 어떻게 꾸리는가—자체 기획인가 대관 전시인가—에 있으며, 교육도 마찬가지로 기관의 목적에 맞는 컬렉션과 아카이브에 기반한 연구가 수반되지 않으면 오리지널 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어렵다. 따라서 무엇보다 기존의 미술관뿐만 아니라 앞으로 기획되는 미술관에서는 컬렉션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개인 소장품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이들에게 충분한 크레딧을 부여하면서 의미 있는 컬렉션을 구축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미술관을 곧 (텅 빈 기념비적) 랜드마크 건축물로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유무형의 콘텐츠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미술관은 절대적으로 콘텐츠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그것은 스타 건축가가 만들어내는 독특한(글로벌 맥락에서는 획일화된) 공간일 수도 있고, 때로는 매우 뿌리 깊은 지역의 장소성을 담아낸 소박한 공간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콘텐츠의 다양한 재구성을 가능케 하는 버추얼 공간일 수도 있다.

미술관Museum에는 영감을 주는 뮤즈Muse의 의미가 담겨 있다. 미술관이 진정한 뮤즈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전문가와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모여 끊임 없이 새로운 논의를 하고 새로운 프로젝트 시도하는 플랫폼이자 장場으로 기능해야 한다. 이것은 곧 블록버스터 전시로 수익을 창출하는 임대 공간에서 창조적 ‘참여 공간’으로 전환하는 궁극적인 대안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 시대의 미술관이 역사적 공간에서 의미 있는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발적 의지로 문화적 논의와 실천에 개입하는 개인, 미학적 논의를 사회적/정치적 논의로 확장시킬 수 있는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회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

김정혜 Jeong Hye Kim (originally published in Public Art, Jun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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