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from the End

세상 끝에서 피어나는 삶

이스트엔드(East End)는 런던시의 강북 동쪽 지역 일대를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이름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경계를 정확하게 가르기가 어렵다. 정확하게 이스트엔드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를 정의할 수는 없지만 대략 타워 햄릿츠 버로우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쇼어디치와 혹스턴을 포함하는 남부 해크니 지역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스트엔드는 런던 서부에 비해 줄곧 낙후된 지역으로 알려져 왔다가 2012년 런던 올림픽을 계기로 개발 붐이 일면서 그간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었던 이 곳의 오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부동산 개발업자와 관광객들 사이에는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스트엔드 삶의 풍경 (삽화) - 크게보기 이미지클릭

이스트엔드 풍경 (삽화) – 크게보기 이미지클릭

사람들이 모이고 소통하는 시장과 펍, 맛과 멋이 어우러진 카페와 레스토랑, 수 많은 아티스트들의 작품과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갤러리와 공연장들. 이런 면에서 보면 이스트엔드는 서울의 홍대 앞이나 신사동 가로수길 같은 대도시의 문화 거리라 하는 곳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상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스트엔드의 문화는 백 년 이상 수 많은 이민자들의 치열한 삶이 엮어 낸 역사의 산물로서,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문화의 거리로 기획되고 조성되는 경우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이스트엔드만의 독특한 혼성적 문화 컬러를 만들어내는 요인은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이민자들의 집합지였다는 데 있다. 유태인을 시작으로 하여 유럽 각국의 이민자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그리고 베트남 이민자까지 다양한 민족과 종교적 배경이 이스트엔드 안에 어우러져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런던, 서민들의 삶이 배어 있는 펍과 비정하고 거친 뒷골목을 배경으로 활보하는 연쇄살인범 잭 더 리퍼의 스토리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의 리얼리티가 묻어나는 여러 소설들에서 이스트엔드가 배경이 되었던 것도 이 곳이 실제로 이민자들이 생존을 위해 거친 싸움을 펼치는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과 사람들의 에너지는 당시에도 관심을 끄는 요인이었던 듯, 기록에 따르면 이스트엔드는 백 년 전에도 이미 타지인들이 궁금증을 안고 찾는 관광지로 꼽혔다고 전해진다.

괴도 루팡

잭  더 리퍼

예술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점에서 이스트엔드는 지금은 개발로 옛 모습을 거의 상실한 과거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나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와 흡사한 점이 많다. 이스트엔드에서 펼쳐지는 예술 풍경은 예의 문화 거리와 마찬가지로 아티스트와 그들을 따라 움직이는 갤러리와 공연장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한편, 이 지역에는 멀티 장르의 예술과 삶이 중층적으로 결합된 ‘더 해크니 컷’ 같은 실험 공간들이 존재하는데, 이런 형태는 타지역에서 같은 예를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더 해크니 컷’은 런던 사운드 페인팅 오케스트라의 설립자이기도 한 뮤지션 디에고 가이머스(Diego Ghymers)와 사진 작가 조세페 피아차(Joseppe Piazza), 그리고 셰프 다비데 비뇰리(Davide Vignoli)가 공동으로 설립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음악과 공연, 시각예술과 미식 문화가 어우러진, 유연한 종합성을 특징으로 하는 실험 공간이다. 아울러 20세기 초의 물품 창고를 개조한 ‘더 해크니 컷’의 건물은 아티스트들의 실험이 이 지역의 삶과 역사와 결합되는 데 매우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더 해크니 컷’ All rights reserved by Joseph O'malley

‘더 해크니 컷’
All rights reserved by Joseph O’malley

이스트엔드에 거주하며 살아 온 이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시간들은 낡은 빅토리아 양식의 건축물이나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근대기 공장 건물 속에 배어있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거리 장터인 브로드웨이 마켓 초입에 자리한 ‘마켓 카페’처럼 백 년의 역사(장소와 시간 그리고 맛)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음식점은 이스트엔드에서 꽤 여럿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산업시대의 공장이나 창고 건물은 종종 지역민들의 회합장으로 활용되면서 지역 커뮤니티의 소통과 결합에 기여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맞이 해크니 지역 노숙인 돕기 자선 모임이 열리는 옛 공장 창고 건물

크리스마스 맞이 해크니 지역 노숙인 돕기 자선 모임이 열리는 옛 공장 창고 건물

그러나 이처럼 오래된 건축물들이 거대한 재개발 계획 앞에서 아무런 노력 없이 쉽게 보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자본력을 앞세운 화려한 개발 계획 앞에서 맥없이 철거되어가는 역사적 건축물들을 지키기 위해 이스트엔트 보존 협회(The East End Preservation Society)가 설립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지역민들이 직접 힘을 모아 건축물 하나 하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워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이스트엔드 주민들의 많은 기억을 담고 있는 ‘유태인 산모 병원(Jewish Maternity Hospital)’, ‘과일 & 모직 무역 상회(Fruit & Wool Trade)’, ‘퀸 엘리자베스 어린이 병원(Queen Elizabeth Children’s Hospital)’ 건물들이 다수 지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개발 계획 앞에 무참히 철거되고 말았다. ‘더 마키 오브 랜스다운(The Marquis of Lansdowne)’이라는 펍 건물의 보존이 결정되었을 때 뉴스 기사로 다루어졌다는 것은 지금 이스트엔드에서 보존되는 건물보다 사라져가는 건물들이 훨씬 더 많다는 점을 말해준다.
철거된 유태인 산모병원

철거된 유태인 산모병원

건물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이 곳의 문화를 만들어 왔던 사람들 또한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이것은 마치 예전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와 브루클린 지역이 거쳐왔던 고급주택지화의 과정과 흡사하다. 그리니치 빌리지와 브루클린이 그러했듯이, 이스트엔드의 예술가 지역도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더 동쪽 끝을 향해 이동해간다. 처음에는 비교적 서쪽 편에 위치한 쇼어디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아티스트 구역은 이제 더 이상 ‘가난한’ 예술가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 되었고, 점차 보다 동쪽에 위치한 해크니, 바이너 스트리트, 베스널 그린, 그리고 더 멀리 동쪽 끝 마일엔드로까지 이동해왔다. 이렇듯 한 번 문화적인 독특함이 외부에 알려지면 그 곳은 문화 소비자들이 찾아들면서 경제적으로 활기를 얻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작 그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살기 어려운 곳으로 변하는 아이러니가 펼쳐지기도 한다. 백 년이 지난 후에도 이스트엔드에 축적된 역사적 시간과 문화가 그 자리에 남아 있기를 바라며.

김정혜 Jeong Hye Kim

Winter 2013, Magazine A (Hyund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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