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Who Feel Differently (4/5)

*The artist Carlos Motta generously gave permission to post the text from his project http://wewhofeeldifferently.info/
en-kr translation by Jeong Hye Kim

1   2   3   4   5

Part IV: Silence, Stigma, Militancy and Systemic Transformation: From Act Up to AIDS Today

4부 : 침묵, 오명, 전투, 그리고 시스템적인 변화: 액트업에서 오늘의 에이즈까지

Act Up
액트업

 

Eric Sawyer
Co-founder of ACT UP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ACT UP took many of its own development queues for the early gay and lesbian liberation and the anti-war movements. We decided really early on that we were going to use ‘Robert’s Rules of Order’; that we were going to be an equalitarian organization where everybody’s voice had equal weight and that we were going to do a majority rule voting process to determine what we would do. We decided that members of our group would facilitate discussions, that anyone could present ideas, and that we wanted to do ‘in your face’ street theatre type demonstrations that would be non violent in nature, but that would draw public attention to our issues.

에릭 소이어
액트업 공동창립자
미국 뉴욕 뉴욕
액트업은 초기 게이 레즈비언 해방 운동과 반전운동까지 수 많은 자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일찍이 ‘로버트 규칙’(Robert’s Rules of Order)을 활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동등한 힘을 얻는 평등한 조직이 되고, 우리가 할 일은 투표를 거쳐 다수결로 결정됩니다. 그룹 멤버들이 토론회를 열어 누구나 생각을 표현하도록 하였고, ‘인 유어 페이스’ 거리 극장 형식의 시위를 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비폭력적이면서 우리들의 문제에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Sarah Schulman
Activist and Novelist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Direct action was a concept that came from Martin Luther King, Gandhi, and the early labor movement. The idea was to actively take an action that creates the condition you need in order to move forward. You are not involved so much in theory, but much more involved in the application of theory to practice. ACT UP started this strategic approach that was consistent with American history. When I was reading Martin Luther King’s piece, Letter from Birmingham Jail, he lays out exactly what the ACT UP strategy was.

사라 슐만
행동주의자 겸 소설가
미국 뉴욕 뉴욕
직접 행동은 마틴 루터 킹, 간디, 그리고 초창기 노동운동에서 유래한 개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내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론보다는 이론을 실천에 적용하는 것과 훨씬 더 많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액트업은 미국 역사에서 줄곧 있어 왔던 이러한 전략적 접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이 쓴 ‘버밍햄 옥중 서신’을 봤을 때 그의 생각이 액트업의 전략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Even though we did not study Doctor King, we absorbed that this was the way to go. First, you highly educate yourself so that you completely understand all the issues, then you propose a solution to the powers that be; a solution that is entirely winnable, reasonable and doable. When they oppose you, they are now in a position where they are unreasonable, so you do direct-action to force them, or embarrass them into having to respond to you. That is the strategic sequence and that is how ACT UP was effective.

킹 박사를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가야 할 길로 받아들였습니다. 첫째, 교육을 많이 받아 모든 사안들을 완전하게 이해하여 권위에 맞서 해결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승리할 수 있고 논리적이며 할 수 있는 안입니다. 여기에 반대한다면 현재 그들은 논리적인 입장이 아니므로, 직접행동을 하여 당혹스럽게 만들어서 응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략적인 단계이고 액트업은 이 방식을 통해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Eric Sawyer
Co-founder of ACT UP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We quickly learned that street theater and sexy images, graphics and gimmicks were really effective at drawing media attention. We quickly learned that the media was really lazy, and stupid, and never properly represented the images or the issues that we were trying to draw attention to in their articles. We learned that if we had posters and graphics that clearly spelled out the intent of the demonstration and our demands, the message would get conveyed to the public.

에릭 소이어
액트업 공동창립자
미국 뉴욕 뉴욕
거리 극장, 섹시한 이미지들, 그래픽과 전략들이 미디어의 관심을 끄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습니다. 미디어는 게으르고 멍청하며, 우리가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이미지나 사안들을 한번도 제대로 기사로 재현하지 않는다는 것을 금새 알게 되었지요. 포스터나 그래픽으로 시위의 의도와 우리의 요구를 분명하게 표현한다면 메시지가 대중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Mattilda Bernstein Sycamore
Activist
Santa Fé, New Mexico
United States

When I went to San Francisco I k new I wanted to go to ACT UP. ACT UP of course is the 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 and the point of ACT UP was to challenge the violence of mostly government inaction that was enabling people to die of AIDS. At that time I think there were about fifty ACT UP’s in the US and around the world about a dozen or more. Probably a couple dozen, actually. But each one had a different focus.

마틸다 번스타인 시카모더
행동주의자
미국 뉴멕시코 산타페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액트업에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액트업은 물론 파워를 일으키기 위한 에이즈 연맹으로, 에이즈로 사람들이 죽어가게 만드는 정부의 무대응이라는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당시 미국에만 50개의 액트업이 있었고 전 세계적으로 열 개 이상의 단체가 결성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실제로 수 십 개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단체들이 각기 다른 핵심 쟁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Act Up San Francisco had recently split, so there were two Act Up’s in San Francisco. One of them was Act Up Golden Gate, which was very focused on “treatment activism” or getting drugs into bodies. Act Up San Francisco focused on several different areas: Universal healthcare, needle exchange, prisoners with HIV/AIDS, and women with HIV. There was a really integrated politic where people said: “You can’t fight AIDS without fighting misogyny, racism, classism and homophobia.” It was all tied together.

액트업 샌프란시스코는 최근에 분리되어 현재 샌프란시스코에는 두 개의 액트업이 존재합니다. 그 중 하나인 액트업 골든 게이트는 ‘치료 행동주의’ 혹은 신체에 약물을 투여하는 것, 바늘 교체, HIV/에이즈 감염 수감자, 여성 HIV 감염자 문제에 상당히 초점을 둡니다. 여기에는 매우 통합적인 정치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여성혐오, 인종차별, 계층차별, 호모포비아와 싸우지 않고서는 에이즈에 맞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문제들입니다.

There was no shame about being HIV positive, the shame was on the government, the politicians, the Church, and the demagogues around the world who were facilitating the mass murder of people with HIV/AIDS.

HIV 양성반응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이들은 에이즈 감염자들의 대규모 죽음을 발생시키는 전 세계의 정부, 정치인들, 교회, 대중선동자들입니다.

 

Eric Sawyer
Co-founder of ACT UP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We were drawing attention to governmental leaders who were shirking their responsibilities. Ronald Reagan never said the word ‘AIDS’ or talked about HIV for the first seven years of his presidency, so we basically called him a murderer. The use of these graphics and doing things. Like here, we constructed a concentration camp on the back of a float-bed truck for gay pride parade in 1987;

에릭 소이어
액트업 공동창립자
미국 뉴욕 뉴욕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는 정부 지도자들에게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처음 7년의 재임기간 동안 한 번도 ‘에이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고 HIV에 대해 이야기 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를 살인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래픽을 사용하며 활동하였습니다. 여기에서처럼 우리는 1987년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에서 트럭 짐칸에 수용소를 만들었습니다.

the first ACT UP presence in New York City’s gay pride demonstration. We literally, me with my power tools and some friends, constructed a tower on the flatbed of a pickup truck using two-by-fours for a fence post and barbed wire and mesh to make a concentration camp on the back of the truck with a rifle tower up by the cab. I sat on the roof in a suit with a Ronald Reagan mask on and wearing yellow rubber gloves, laughing and pointing at the AIDS victims that were dressed in black, while people in police and military uniforms with masks and rubber gloves walked around the perimeter of the concentration camp. The banner on the side of the float said ‘Test Drugs, Not People.

뉴욕시 게이 프라이드 시위에서 액트업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 이 때입니다. 저는 실제로 전시드라이버를 들고 제 친구들과 함께 픽업트럭의 짐칸에 타워를 세웠습니다. 2×4 크기의 합판으로 담장을 두르고 가시철사를 드리워 트럭을 수용소로 만들고 차체 옆에는 가짜 소총을 세웠습니다. 저는 정장 차림에 레이건 마스크를 쓰고 노란색 고무 장갑을 낀 채 지붕에 앉아서 검은색 옷을 입은 에이즈 희생자들을 손가락질 하며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경찰 제복과 군복을 입고 마스크와 고무 장갑을 착용한 사람들은 수용소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트럭의 옆면에는 ‘사람 말고 약물을 테스트하라’라는 문구의 배너를 걸었습니다.

 

Mattilda Bernstein Sycamore
Activist
Santa Fé, New Mexico
United States
A lot of the people who became my queer heroes, or at least people who I respected, I found out about it in their obituaries. David Wojnarowicz is an example, I read his obituary and I was like, ‘Oh, this person sounds great.’ Or even you would go to a Derek Jarman movie and then a few days later he was dead. Especially in terms of people to look up to who were fags, and fags living on the margins, it was considered that you were dying. We are dying. And so there so there was that urgency around needing to engage in direct action immediately to change the status quo.

마틸다 번스타인 시카모더
행동주의자
미국 뉴멕시코 산타페
저의 퀴어 영웅이 된 사람들 혹은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을 저는 부고란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한 예로 데이비드 워즈나로프스키를 들 수 있습니다. 그의 부고를 읽고 나서 ‘아, 정말 멋진 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데렉 자만의 영화를 보고 나서 몇 일 후에 그가 죽었지요. 특히 동성애자로서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훌륭한 사람들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죽어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 상태를 당장 변화시키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에 긴급히 참여해야 합니다.

 

Sarah Schulman
Activist and Novelist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For example, when ACT UP went into St. Patrick’s Cathedral, this is ACT UP’s most famous action “Stop The Church.” The Catholic Church had gotten into the public school boards in NYC, even though their children did not go to public schools, they went to catholic school. And they passed rules that there cannot be condoms handed out in the public schools. At ACT UP we realized that people would die because of what the catholic church was doing, and that therefore we had a moral right to go into their church and interrupt their mass. So we did it. Today you can get condoms in the public schools. People’s lives have been saved because we took that action. People asked how we could go into a church because you come to the point to decide that gay people’s lives equal the church, the church is not more important than gay people’s lives. Gay people’s lives are more important that the church.

사라 슐만
행동주의자 겸 소설가
미국 뉴욕 뉴욕
액트업이 세인트 패트릭 교회로 들어갔을 때가 가장 유명한 ‘교회는 멈추라’(Stop The Church) 행동이 있었을 때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자신의 아이들이 공립학교에 다니지 않고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데도, 뉴욕의 공립학교 이사회로 들어가 학교에서 콘돔을 나눠주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통과시켰습니다. 액트업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하는 일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이들의 교회에 들어가 미사를 방해할 수 있는 윤리적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공립학교에서 콘돔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동을 하여 사람들의 생명이 구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교회에 들어갈 생각을 했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게이들의 삶이 교회와 동등하고, 교회가 게이들의 삶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고 확신하는 지점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게이들의 삶은 교회보다 더 중요합니다.

 

Representation of AIDS
에이즈의 재현

 

Douglas Crimp
Art Critic and AIDS Activist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I was interested in the fact that there was an art world response to AIDS. There were many people in the art world that became ill and died from AIDS. I was interested in the notion that you could use the monetary value of art to raise money for AIDS, whereas I thought that a political subject like AIDS could actually be taken on by culture as a subject.

더글러스 크림프
미술비평가 겸 에이즈 행동주의자
미국 뉴욕 뉴욕
에이즈에 대해 예술계에서 반응을 한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예술계에는 에이즈로 병들고 죽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술의 통화 가치를 높여 에이즈 기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에이즈 같은 정치적인 주제가 문화적 주제로 실제 채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Through talking to someone who became a great friend Gregg Bordowitz, who was a young AIDS activist making video work on AIDS, he said, if you want to know about AIDS, go to the Act Up meetings, and I did. Within a few weeks I completely changed my idea of what I had to do. First of all I became very quickly educated about the extent of the crisis and about how people were responding to it in New York City. I realized this was an issue that deserved way more than a couple of essays so I immediately thought of expanding to do a special issue.

에이즈 관련 비디오를 만드는 젊은 에이즈 행동주의자인 그레그 보르도비츠와 이야기를 나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에이즈에 관해 알고 싶으면 액트업 모임에 가 보라는 그의 말에 따라 저는 그 곳에 가 보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아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에이즈의 위험성과 뉴욕시민들이 이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해 매우 빨리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몇 편의 에세이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이 요구되는 사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즉시 특집호를 펴기로 확대 기획하였습니다.

I asked my fellow editors of October and they said fine, go ahead. And then it grew from there, becoming very different from anything else in October because it was not a high theory approach to the subject but a mixed approach to writing about AIDS. For example, Leo Bersani’s famous essay “Is the Rectum a Grave?” was published alongside people who had no academic credentials, who were activists working in the movement, such as a prostitute who was doing activist work around prostitutes and AIDS.

저의 동료인《옥토버》지의 편집인들에게 이를 요청했고 모두 동의하여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옥토버》 매거진의 다른 글들과는 매우 다른 것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고차원적인 이론적 접근이 아니라 에이즈 관련 글쓰기에 대한 혼합적인 접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레오 베르사니의 유명한 에세이 ‘직장(直腸)은 무덤인가?’는 매춘과 에이즈 문제를 위해 활동하는 매춘부처럼 전혀 학문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 직접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행동주의자들의 글과 함께 실렸습니다.

I was very struck by the return to clichés of homophobic discourse and wanted to show the way in which gay people themselves had fallen back on a discourse that labeled gay people as, for example, immature and irresponsible, within attempts to do something about AIDS. My interest wasn’t to try to think about how you could maintain a healthy sexuality in relation to this epidemic through safe sex practices, but about how you could maintain a pro-sex positive position.

저는 호모포비아 담론이라는 상투적인 문제로 다시 회귀하는 사실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래서 에이즈에 관해 뭔가를 하려는 시도의 안에서, 게이들에게 따라 붙는 미성숙함이나 무책임함 같은 꼬리표를 붙이는 논의로 게이들 스스로가 다시 빠져드는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저의 관심은 안전한 섹스 행위를 통해 이 질병의 확산을 막고 건강한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유지하는가 아니라, 어떻게 친섹스적인 긍정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How you could think about promiscuity and what we had learned from the wide-ranging experiences of having sex with many different people for many different purposes: For pure pleasure, for discovering things about yourself that you didn’t already know through an encounter with another, etc. How you could actually understand that as having given us the tools to invent the safe sex discourse in the first place. How, for example, you could have a viable public sexual culture in terms of bars, bathhouses, and sex clubs and so forth that would also become venues for the transmission of knowledge about safe sex practices, and how to stop transmitting the virus.

어떻게 혼교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지, 그리고 여러 가지 다양한 목적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의 광범위한 섹스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순수한 쾌락, 다른 경험을 통해 이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기 등). 어떻게 하여 그것을 처음부터 안전한 섹스 담론을 창출하기 위해 주어진 도구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하면 바, 목욕탕, 섹스 클럽 등을 안전한 섹스 행위에 관해 그리고 바이러스 전염을 멈추는 방법에 관한 지식을 교류하는 장소로 보고, 공공의 섹슈얼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Things changed very drastically after AIDS, not only because of repressive forces. I think that the crisis itself, and people dying cast a long shadow over the pleasures of gay culture; not only were bathhouses and sex clubs closed by city ordinances in 1985, but also people just weren’t going out as much and taking as much pleasure in gay life, partly because they were afraid, but also people were busy fighting the situation or taking care of lovers and friends. The explosion of a public sexual culture, which had happened between Stonewall and the early 1980s was really shut down.

에이즈 이후, 반드시 억압적인 힘 때문만이 아니라, 많은 것들이 급격히 변화되었습니다. 위기 그 자체,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게이 문화의 즐거움에 오랜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생각합니다. 1985년 시 법령에 의해 목욕시설과 섹스 클럽들이 문을 닫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전처럼 그 곳에 많이 가지 않고 게이 삶의 쾌를 과거처럼 즐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황에 맞서 싸우거나 자신의 애인과 친구들을 돌보는데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스톤월과 1980년대 초에 있었던 공공 섹슈얼 문화의 부흥은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The Demise of Act Up
액트업의 종말

 

Sarah Schulman
Activist and Novelist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Why did ACT UP
fall apart or why did that impulse end? And it’s for some really complicated reasons. One is the rate of death was so profound; the dying of the leadership and the psychological consequences on members surrounded by mass death for so many years had enormous impact on people.

사라 슐만
행동주의자 겸 소설가
미국 뉴욕 뉴욕
액트업은 왜 해체되었고 그 열정은 왜 끝이 났는가? 거기에는 매우 복잡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사망률이 매우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지도자의 죽음, 그리고 수 년 간 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둘러싸인 멤버들이 받은 심리적인 영향은 대단히 컸습니다.

 

Eric Sawyer
Co-founder of ACT UP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The demise of ACT UP, and it went from being several thousand people in New York,  and eight hundred or a thousand people coming to a meeting and then contracted back to two to three hundred people. Around the mid nineties when then when the HIV ‘cocktail’ was approved. That primarily happened for two reasons: Firstly, when effective treatments became available all of our friends stopped dying; it was no longer a ‘war siege,’ where the community had to engage as if we were fighting a war. The fact that people were getting on treatments and their health was being restored, and that the number of deaths was dramatically reducing, ended the crisis siege. Many people who weren’t infected and who had careers, or whatever, went back to their normal lives.

에릭 소이어
액트업 공동창립자
미국 뉴욕 뉴욕
액트업은 끝이 났습니다. 수 천 명의 뉴욕 시민들이 참여하던 이 모임은 800~1000명으로 그 수가 줄어들다가 HIV ‘칵테일’ 치료법이 승인된 90년대 중반 즈음에는 200~300명 정도로 감소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주로 두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 효과적인 치료 방안이 마련되면서 친구들의 더 이상 죽지 않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전쟁을 치르듯이 커뮤니티가 관계해야 하는 ‘전쟁 포위’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건강이 회복되었고 사망자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위험한 포위 상태가 끝났습니다. 감염되지 않고 직업이 있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으로 많이 되돌아갔습니다.

 

Sarah Schulman
Activist and Novelist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The invention of protease inhibitors and AIDS medications, which became available to people who could afford them and lived in a manner in which they were able to manage taking them, those people abandoned all the other people for whom that was not the case.

사라 슐만
행동주의자 겸 소설가
미국 뉴욕 뉴욕
프로테아제 억제제와 에이즈 치료제가 발명되고 나서 약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를 복용하고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Mattilda Bernstein Sycamore
Activist
Santa Fé, New Mexico
United States

Act Up in the late 80’s to the early 90’s was big. If you went to an ACT UP NY meeting there would be 300 people there. San Francisco might have had 100 or more. When I got involved in ACT UP there would never be more than 30 or 40 people. But also, it wasn’t trendy. In the late 80’s, especially in the late 80’s it was trendy. So if you said you were in ACT UP, people would be like ‘well, anyway, I was in ACT UP in ‘89’. But you know people are still dying and nothing has changed so maybe you should be in it now. So there is definitely that apathy.

마틸다 번스타인 시카모더
행동주의자
미국 뉴멕시코 산타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액트업은 규모가 컸습니다. 뉴욕의 액트업 모임에 가보면 300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100여 명 정도가 모였을 것입니다. 제가 액트업에 들어갔을 때는 30~40명을 넘은 적이 없고 지금은 유행도 아닙니다. 1980년대, 특히 80년대 후반에는 유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액트업에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응, 그래, 나도 1989년에 액트업에 있었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죽어가고 있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으므로 아마도 지금이 액트업에 들어가야 할 때일 것입니다. 지금은 이러한 절대적인 무관심이 존재합니다.

 

Sarah Schulman
Activist and Novelist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The election of Clinton was hugely disruptive to building independent activist movements because people gave him too much power and had too much faith in him, so members began working in the Democratic Party and got lost as they became part of the system.

사라 슐만
행동주의자 겸 소설가
미국 뉴욕 뉴욕
클링턴이 당선되면서 사람들이 그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위를 부여하고 지나친 신뢰를 가져, 독립적인 운동을 만들어가는 일이 크게 타격을 받았습니다. 멤버들은 민주당 내부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체제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자신을 잃어갔습니다.

 

Mattilda Bernstein Sycamore
Activist
Santa Fé, New Mexico
United States
But also, it was just that he was elected period. And I think that made a lot of people completely apathetic. Like immediately. Like ‘we have arrived.’ Now we have Obama. We don’t need ACT UP anymore, we don’t need to be on the streets, we need to be in the board rooms, we need to be making policy, he’ll let us into the room, we need to be acting more normal and respectable and aiming for his ear.

마틸다 번스타인 시카모더
행동주의자
미국 뉴멕시코 산타페
게다가 그것은 그의 재임기간뿐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완전히 무관심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빠르게, 우리가 마치 다 이룬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오바마 시대입니다. 더 이상 액트업은 존재하지 않고 거리로 나갈 필요도 없이 우리는 위원회에 가서 정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바마는 우리를 들어오라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일상적으로 존중 받을만한 방식으로 그의 귀를 공략해야 합니다.

 

Douglas Crimp
Art Critic and AIDS Activist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Another thing that happened in the AIDS Crisis as we were dealing with it that is prior to the invention of the cocktail, which is the recognition, the gradual recognition over time within ACT UP of the structural extent of the crisis of health care in the United States. That for example, in the United States we still have a crisis in healthcare. We have learned under Obama’s presidency, how utterly retractable health care is in this country. AIDS was mapped onto that, and we were no longer just thinking about dealing with the question of say, drugs into bodies, but also the incredible discrepancy between the way rich and poor people could access those drugs once they came through the pipeline. We began taking on a much bigger political issue, which felt insurmountable to some people. It became more consciously on all of our parts a huge global issue.

더글러스 크림프
미술비평가 겸 에이즈 행동주의자
미국 뉴욕 뉴욕
우리가 일하면서 마주하게 된 또 다른 에이즈의 위기는 칵테일 치료제의 발명보다 우선하는 것, 즉 인식의 문제입니다. 액트업 내부에서 미국 내 의료제도의 위기가 구조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점차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에서 여전히 우리는 의료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오바마 정부에서 우리는 이 나라에서 의료 서비스가 얼마나 축소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에이즈는 의료 문제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몸에 약물을 투여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약이 나왔을 때 그 약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얼마나 많이 다른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훨씬 더 큰 정치적인 사안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극복할 수 없는 문제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보다 의식적인 차원에서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거대한 글로벌 이슈가 되었습니다.

 

Eric Sawyer
Co-founder of ACT UP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The seed of activism began to shift away from the United States or the developed world countries to center on the developing world. We were getting access to treatment, programs and safety nets in the U.S., Canada, France, and Germany, etc. But the developing world had access to nothing, so the focus of activism changed. I was one of the first people that started organizing international things because I was getting invited to many conferences, global meetings of the United Nations,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and other associations of nurses, and medical doctors, to speak about AIDS activism, about living with HIV and about housing issues. I started meeting many people living with HIV from developing countries who couldn’t even get aspirin and who couldn’t get the most basic treatment.

에릭 소이어
액트업 공동창립자
미국 뉴욕 뉴욕
운동의 씨앗이 미국 등의 선진국에서 개발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우리는 치료를 받고 여러 프로그램과 안전망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발국에서는 어느 것에도 접근을 할 수가 없어서 운동의 초점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 컨퍼런스, UN, 국제건강기구 그리고 간호사 및 의사들의 연합에서 개최하는 글로벌 미팅에 초청받아 에이즈 행동주의와 HIV를 안고 살아가는 삶, 주택문제 등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국제적인 조직화를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개발국가에서 아스피린도 없이 아주 기본적인 치료도 받지 못한 채 HIV를 안고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The Present
현재

 

Eric Sawyer
Co-founder of ACT UP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There is still a huge crisis in the developing world. We are making a certain level of progress on that crisis, but for example in 2006 there was a declaration of commitment signed at the UN by just under 200 countries, where they made commitments to reduce the number of new infections and the number of deaths by HIV every year. They made a commitment to get everyone access to HIV medications by December of 2010.

에릭 소이어
액트업 공동창립자
미국 뉴욕 뉴욕
개발국가에는 여전히 거대한 위기가 존재합니다. 그 문제에 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6년에는 거의 200개의 UN 회원국이 새로운 HIV 감염자와 그로 인한 사망자 수를 줄이는 결의안에 사인을 했습니다. 이들은 2010년 12월, 모든 사람들이 HIV 치료약에 접근할 수 있도록 결의하였습니다.

We are in 2011 now, and while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and UNAIDS’ statistics say that around 15 million people need to be on HIV medications today, we have just over 5 million people on HIV treatment around the world. Only a third of people who need treatment today are on HIV medication. We have failed as a global society in obtaining the ‘Commitment to Universal Access.’ There will be a meeting in June 2011, which is one of the things that I am working on now, where governments will negotiate a new commitment to delineate the global HIV response by governments for the next five or ten years.

지금 우리는 2011년을 살아 가고 잇습니다. 국제건강기구와 UN에이즈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1500만 명의 인구가 HIV 치료 약물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500만 여 명의 인구만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치료가 필요한 전체 인구 가운데 3분의 1만 HIV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지구촌 사회에서 ‘평등한 접근에 대한 결의’를 이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2011년 6월에 제가 관여하는 모임이 열릴 예정인데, 여기에서 각국 정부들은 향후 5년에서 10년 사이 전 지구적으로 HIV에 대응하는 새로운 결의안에 합의하게 될 것입니다.

There has been a huge generational divide between queer youth and my generation or the generation that immediately followed me. Most young people today, including queer people and queer activists, grew up after the HIV virus was discovered, and after the HIV epidemic was widely known. Most of them became teenagers and young adults after the AIDS cocktail came to the market, so now we are in 2011, and many of them think of HIV as a chronic illness that you can take medication for and live a healthy life. They don’t see AIDS as a crisis. They don’t have a sense of urgency, they don’t fear HIV, and so they are not that concerned about getting HIV, they engage in unsafe behavior, they are unwisely and unacceptably exposing themselves to the risk of HIV infection and many of them are getting HIV.

젊은 퀴어들과 저희 세대 혹은 저보다 조금 어린 세대들 사이에 커다란 세대 차가 있습니다. 퀴어와 퀴어 행동주의자를 포함한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HIV 바이러스가 발견된 이후에, 그리고 HIV 전염병이 널리 알려진 이후에 성장한 세대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에이즈 칵테일 치료제가 시장에 출시된 이후에 십대가 되고 성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2011년,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이 HIV를 만성적인 질환으로 생각하고, 약을 평생 복용하면서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에이즈를 위기로 보지 않습니다. 긴급한 인식이 없고 HIV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HIV 보균자가 되는 것에 개의치 않고 안전하지 않는 행동을 하여 어리석게도 HIV 감염의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으며, 그 중 많은 이들이 HIV에 감염되고 있습니다.

 

Douglas Crimp
Art Critic and AIDS Activist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Even for someone who was as involved in it as I was and as someone who deals with being HIV positive and takes the medications, HIV/AIDS doesn’t have the same meaning as it did then. The epidemic is also different for me than it is for many people, such as people in this country and other countries who do not have access to drugs and health care. I think relative to younger generations in the United States there is no memory whatsoever, I mean there can’t be memory, they were born after all of this happened.

더글러스 크림프
미술비평가 겸 에이즈 행동주의자
미국 뉴욕 뉴욕
저 같은 관련자들 그리고 HIV 양성반응자와 치료를 받는 사람들에게조차 HIV/에이즈는 과거와 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전염병은 저와 많은 사람들(약물과 의료에 접근할 수 없는 미국인들 그리고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도 다른 의미입니다. 미국에서 비교적 젊은 세대들에게는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기억이 있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난 이후에 태어났으니까요.

The sort of sense of a community dealing with a crisis at once is gone because it no longer feels like a crisis. There is a big difference between a disease that will almost certainly kill you and one that will almost certainly not. Even when I seroconverted, the ‘cocktail’ was just starting and I remember my doctor saying to me at one point that I would not likely die of AIDS. I remember when the presence of AIDS was in the newspaper every single day.

한 때 위기에 대처하던 공동체의식이라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위기로 느껴지지 않으면서 사라졌습니다. 거의 확실하게 죽음에 이르는 병과 거의 확실하게 그렇지 않는 병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혈청변환을 했을 때에도 ‘칵테일’이 막 시작되고 있었고, 어느 시점에 의사는 저에게 에이즈로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에이즈의 존재가 신문지상에 올랐던 것을 기억합니다.

In fact, I remember fighting to get it in the newspapers every single day when it was not being covered as much as we were experiencing it. I remember reading all kinds of articles on the subject daily and I also remember reading obituaries of people who had died of AIDS every single day. For many years my writing tried to follow and engage these various materials. Now you can go for weeks at a time and never see an article about AIDS in the New York press.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것만큼 매체에서 다루어지지 않을 때 매일 신문지상에서 거론되도록 싸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매일 이 주제와 관련된 모든 아티클을 읽고 매일 에이즈로 죽은 사람들의 부고를 읽었던 생각이 납니다. 수 년 간 저의 글은 이 다양한 자료들을 따르면서 연관성을 가지려고 했었습니다. 지금은 뉴욕 언론에서 에이즈에 관한 기사가 몇 주 동안 안 나오기도 하고 전혀 볼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Eric Sawyer
Co-founder of ACT UP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Pharmaceutical companies present ads and commercials of men climbing a mountain or running a marathon while they are taking this latest approved HIV medication. People think that one pill is going to allow them to run marathons and climb mountains, not knowing that there are horrendous side effects, that drugs don’t work for everybody, that people are developing neuropathy, diabetes, liver and kidney problems, wasting syndromes, cardiovascular disease, peripheral vascular disease, and a whole laundry list of side effects that are debilitating and often kill people far earlier than someone would die if they weren’t HIV infected and getting these complications that are caused by the drugs´ side effects.

에릭 소이어
액트업 공동창립자
미국 뉴욕 뉴욕
제약 회사들에서는 최근에 승인 받은 HIV 약을 복용하면서 등산을 하거나 마라톤에 참가하는 남성의 모습을 담은 광고를 내보냅니다. 사람들은 끔찍한 부작용들이 있고, 그 약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효과가 있지는 않다는 것을 모르는 채, 한 알만 복용하면 마라톤에 참가하고 등반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때로는 신경증이 발병하기도 하고, 당뇨병, 간과 신장 문제, 소모성 증후군, 심장병, 말초 혈관 질환, 그밖에 무수히 많은 부작용으로 인해 체력이 저하되어 종종 HIV에 감염되지 않고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이러한 복잡한 것들을 겪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일찍 죽기도 합니다.

 

A Current Example
현재 사례

 

Kenyon Farrow
Activist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There is no arching policy or approach in terms of HIV transmission in prison, other than it is illegal to have sex in prisons, and illegal to have drug paraphernalia, or do tattooing, which are some ways in which transmission may happen, but primarily sexual contact is what we are talking about. There is really no strategy. What is interesting about the prison system and HIV, which goes against a lot of narratives that people think, is that of all the people who have HIV in U.S. prisons, only about nine percent of them contract HIV in prison. Ninety-one percent of them came to prison HIV positive, and many find out when they are in prison because it is the first time they have ever been offered an HIV test.

케니욘 패로우
행동주의자
미국 뉴욕 뉴욕
감옥에서의 HIV 감염에 관해서는 대정책이나 접근 방안이 없습니다. 감옥에서는 감염이 발생할 수 있는 통로들, 이를테면 섹스, 약품류 소지나 타투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 중 우리가 주로 얘기하는 것은 성적 접촉입니다. 여기에는 실제로 전략이 없습니다. 감옥 체계와 HIV, 이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사실 다른 점이 많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 감옥 내 모든 HIV 감염자들 가운데 9퍼센트만이 감옥 내에서 감염된다는 점입니다. 91퍼센트는 HIV 양성반응자 상태로 감옥에 들어가고, 또 이들 대부분이 그 때 처음으로 HIV 검사를 받아 보균 사실을 알게 됩니다.

There is public health research mounting that is beginning to point to the connections between massive imprisonment and the HIV/AIDS epidemic in the U.S. If we consider New York City, which has one of the highest HIV rates in the country, about ten percent of all people with HIV in the United States live in New York City. Looking at New York City neighborhoods that have the highest HIV rates and incarceration rates, it is almost a one for one match, with the exception of Chelsea being the outlier, because that is where white gay men also impacted by the epidemic live.

미국 내 대규모 수감과 HIV 감염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공공 의료 관련 연구들이 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HIV 보균율을 보이는 뉴욕시를 생각해보면, 전미 HIV 감염자 가운데 10퍼센트 정도가 뉴욕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HIV 보균율과 수감율을 보이는 뉴욕시에서 두 문제는 거의 1대 1로 대응할 정도입니다. 여기에서는 감염된 백인 게이 남성들이 살고 있는 첼시는 제외됩니다.

If you look at the New York State prison system, seventy percent of prisoners in New York State come from seven neighborhoods in New York City, all Black or Latino neighborhoods. If you think about and think about a high percentage of people who are constantly being moved in and out of the state prison system, the social and sexual networks and dynamics change as people are constantly changing partners because of the impact of prison. Public Health researchers are actually looking at massive imprisonment in the U.S. as an actual driver of HIV transmission and to a far less extent sex that may be happening in prisons itself, though some studies look at this, even in states like Georgia, which criminalizes sex between prisoners.

뉴욕 주의 감옥 시스템을 보면 수감자의 70퍼센트가 뉴욕 시에 위치한 7개 지역 출신입니다. 모두 흑인 또는 라티노 거주지역입니다. 끊임없이 주립 감옥에 들고 나는 사람들의 높은 비율을 생각해보면, 파트너가 계속해서 바뀌면서 사회적, 성적인 네트워크와 다이내믹이 변화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공 의료 연구자들은 미국 내 대규모 수감 시스템을 HIV 감염 촉발의 실질적인 원인으로 보고, 감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섹스는 그보다 훨씬 작은 원인으로 바라봅니다 (물론 일부 연구에서 살펴보긴 하지만). 수감자들 사이의 섹스를 범죄시하는 조지아 같은 주에서조차 그렇습니다.

There was one study done by the Center for Disease Control (CDC) and they concluded most prisoners were trying to figure out ways to have protected sex, using Saran wrap, and a range of different things, as condoms were not available or were considered contraband. It is not as though people in prison are not trying to protect themselves. The other interesting thing about that study was that a lot of sex that was happening, about thirty to forty percent of it, was with guards and other staff rather than with other prisoners so there is also a relationship between coercion and systems of security or the conditions in which prisoners sleep with guards in order to be able to get certain kinds of privileges. These are just some of the ways HIV transmission and prison connection defies what people often think.

질병통제센터의 한 연구에 따르면 콘돔이 밀수품으로 간주되어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랩이나 그 밖에 다양한 것들을 콘돔으로 사용하면서 안전한 섹스 방법을 취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려 하는 게 아닌 것입니다. 이 연구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수 많은 섹스 가운데 30~40퍼센트가 다른 수감자가 아닌 교도관이나 스태프들과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강제와 안전 시스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점, 일정한 특권을 누리기 위해 수감자들이 교도관과 잠자리를 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HIV 감염과 감옥의 관계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을 뒤엎는 몇 가지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Barebacking
베어배킹

 

Eric Sawyer
Co-founder of ACT UP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I think it has become desirable because it is new and dangerous. It is exciting because it is something you are not supposed to be doing. There was a time period when pornographers felt a sense of responsibility to ensure that all of their actors engaged in safe sex and they made big deal of showing people putting on condoms. There was an effort to try to eroticize condom use. Then a few people started saying: ‘Well fuck that, it’s really hot to take a load of cum up your ass,’ and started doing bare backing videos, and then it was like: ‘Oh, my god did you see that? Oh, my god that’s so hot!’ So it became edgy and in vogue to say: ‘Oh fuck it, don’t tell us how to fuck.’ Barebacking porno became cool and it is really awful because it is encouraging many people to take risks that they are eventually going to really regret.

에릭 소이어
액트업 공동창립자
미국 뉴욕 뉴욕
그것은 새롭고 위험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 되었습니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어서 흥분되는 일입니다. 한 동안 포르노 제작자들은 모든 연기자들이 안전한 섹스을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콘돔 착용 장면을 보여주는 커다란 딜을 하였습니다. 콘돔의 사용을 에로틱하게 만들려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한편 일부에서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해라, 당신 엉덩이에 하는 게 정말 좋으니까.’ 그리고 콘돔 없는 비디오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 후로는 ‘오 마이 갓, 그거 봤니? 정말 화끈하던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지요. ‘그냥 해라,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치지 말고’라는 말이 신선한 유행이 되었습니다. 콘돔 없는 포르노가 쿨한 것이 되면서 사람들이 결국 후회하게 될 위험을 감수하게 만든 것은 정말로 최악입니다.

 

Douglas Crimp
Art Critic and AIDS Activist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I myself don’t know what to think of a culture that involves notions of wanting to belong to the group of the infected, that sense of belonging that Tim Dean theorizes (in Unlimited Intimacy 2009) as a kind of historical kinship. It is a kind of metaphor that I am not sure what I think of, the notion of the virus as connecting you to all the other people who have transmitted the virus. I don’t actually know what drives barebacking and I think probably most of barebacking culture, and this is only just an assumption, takes place among people who are already infected. I think the people who are tops and the people who are bottoms may take for granted already having the virus and are not particularly worried about the so-called ‘reinfection.’

더글러스 크림프
미술비평가 겸 에이즈 행동주의자
미국 뉴욕 뉴욕
감염자들의 그룹에 속하고 싶어하는 것, 팀 딘이 일종의 역사적 연대감이라고 이론화 했던(저서 『무제한의 친밀성』 [Unlimited Intimacy, 2009]), 소속감과 관련된 이 문화를 저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확신은 없지만, 바이러스라는 개념을 당신과 다른 감염자들을 이어주는 것으로 보는 일종의 메타포입니다. 사실 저는 무엇이 콘돔 없는 섹스를 추동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대부분의 콘돔 없는 섹스는, 단지 가정에 불과하긴 하지만, 이미 감염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미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소위 ‘재감염’에 대해 특별히 염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It is very abstract for a young person to say: ‘This disease means that I will have to see a doctor every three months as part of the standard care, and that I will have to take medications for the rest of my life, medications which have side effects, medications which mean I must be conscious every day of taking them at a particular time and not taking them may mean developing a resistance that could become dangerous to me.’ All of the things that have to do with managing a disease are not transparent.  You don’t recognize the reality of managing a chronic disease until you have one. It may not be AIDS, it could be diabetes, it could be many things, but the kind of drag it is to deal with managing a disease is something that changes your life. I think young people who expose themselves, whether deliberately or not, to risk are not really fully conscious sometimes.

젊은이들에게 ‘이 병은 일반 진료의 일부로 3개월 마다 한 번씩 의사를 만나고, 평생토록 부작용이 있는 약물을 복용해야 하는 것, 약물은 특정한 시간에 매일 의식하고 복용해야 하며, 복용하지 않을 시에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저항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추상적인 설명입니다. 질병의 관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다 투명하지는 않습니다. 직업 겪어보기 전까지는 만성 질환 관리라는 것의 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에이즈뿐만 아니라 당뇨병이나 다른 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장기적인 질병의 관리는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스스로 위험에 노출된 이들은 때로는 정말로 완전한 의식이 없어서라고 생각합니다.

The trouble is that the question of mortality is different when you are young.  For example, when you first lose a parent, there is something about that loss in and of itself that disturbs one’s psyche terribly. But one of the aspects of that disturbance is that you are confronted with death, not just your parent’s death but also your own. The encounter with death in general is like that: It is always double. When you lose someone you also recognize your eventual death and as you grow older, mortality becomes more present in your life in many ways. It could be because of an extreme illness or many deaths in your life or because you begin to lose your youthful vitality and don’t have the energy you once had. There are many ways that mortality becomes something we absorb as an aspect of living. This was always a consideration when we talked about the problem of teaching young people about safe sex, as an aspect of youth is the feeling that you will live forever, you haven’t confronted mortality yet, you are invincible.

문제는 젊은이들의 경우 죽음의 문제를 다르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를 처음 잃으면 정신적으로 심한 괴로움을 야기하는 상실감이 있습니다. 그 괴로움의 일부는 부모의 죽음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죽음 앞에 직면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을 대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언제나 이중적입니다. 누군가를 잃으면 언젠가 닥칠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은 삶의 여러 면에서 보다 현실화됩니다. 그것은 극심한 병이나 많은 죽음들을 목격하고, 젊은 시절의 생동감을 상실하기 시작하면서, 전과 같은 에너지를 가지지 못하면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방법들은 많이 있습니다. 젊음은 자신이 영원히 살 것 같은 기분, 아직 죽음에 직면해보지 못한 상태로 자신을 천하무적처럼 느끼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안전한 섹스에 관해 교육할 때 이 부분을 늘 고려해야 합니다.

1   2   3   4   5

 

A PROJECT BY CARLOS MOTTA
Music: Shawn Hansen 
Animations: Peter burr
Script: Carlos Motta & Cristina Motta
Drawings: Carlos Motta &HumbertoJunca
wewhofeeldifferently.info

카를로스 모타 프로젝트
음악: 숀 한센
애니메이션: 피터 버
스크립트: 카를로스 모타, 크리스티나 모타
드로잉: 카를로스 모타, 움베르토 윤카
wewhofeeldifferently.info

Advertisements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

%d bloggers like this: